
어쩔 수 없이 쓴 사직서, 법적으로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 — 진의 아닌 의사표시와 강요
안녕하세요, 루루맘입니다.
"회사에서 다들 사직서 내래서 저도 어쩔 수 없이 냈습니다."
"징계하겠다고 하니까 그냥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직서를 안 내면 더 불이익이 생길 것 같아서 서명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직서를 낸 분들이 나중에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정말 그만두고 싶어서 쓴 게 아닌데, 이게 유효한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어떤 경우에는 무효입니다. 그리고 무효가 된다는 것은 그 사직서에 기반해서 이루어진 퇴직 처리가 실질적으로 해고에 해당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은 사직의 의사표시에 하자가 있는 경우, 구체적으로 진의 아닌 의사표시와 강요에 의한 사직서가 법적으로 어떻게 다뤄지는지 판례 중심으로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진의 아닌 의사표시란 무엇인가
민법 제107조는 이렇게 규정합니다. 자기의 진의와 다른 의사표시를 한 경우에도 원칙적으로 그 의사표시는 유효합니다. 다만, 상대방이 표의자의 진의가 아님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경우에는 무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의'는 표의자가 진정으로 마음속에서 바라는 사항이 아닙니다. 특정한 내용의 의사표시를 하고자 하는 표의자의 생각을 말합니다.
이게 조금 복잡하게 들릴 수 있으니 사직서에 대입해 보겠습니다.
사직서를 쓰면서 "내가 이걸 쓰면 퇴직 처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 자체로 진의 아닌 의사표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의는 "사직서를 제출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하려는 생각"이 있었는지를 봅니다. 내심으로 그만두고 싶지 않았더라도, 당시 상황에서 그것이 최선이라 판단해서 스스로 결정했다면 진의 아닌 의사표시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진의 아닌 의사표시로 인정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요.
진의 아닌 의사표시가 인정되는 경우
판례가 반복적으로 진의 아닌 의사표시를 인정하는 유형이 있습니다.
회사 방침에 따라 일괄 제출을 요구받은 경우
경영사정 악화를 이유로 전 직원에게 미리 인쇄된 양식의 사직서를 배부하고 일괄 제출을 요구한 사안에서, 법원은 진의 아닌 의사표시라고 판단했습니다. 사직서 제출을 강요 내지 종용한 것에 다름 아니라는 이유였습니다(서울고등법원 2008. 5. 14. 선고 2007누29224 판결).
형식적이라고 안심시키며 받아낸 경우
품질불량 문제로 팀 전원이 마지못해 형식상 사직서를 제출했는데, "수리될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켜 놓고 유독 마지막까지 항의한 사람의 사직서만 수리한 사안에서 대법원은 진의 아닌 의사표시라고 판단했습니다(대법원 2010. 1. 14. 선고 2009두15951 판결). 회사도 진의가 아님을 알았다고 본 것입니다.
고용승계를 약속하며 사직서를 받아낸 경우
위탁관리로 전환하면서 고용승계를 전제로 사직서 양식을 배부해 일괄 제출을 요구한 경우, 근로자들은 사직의 의사 없이 외관상 제출한 것이므로 무효라고 봤습니다(서울행정법원 2012. 4. 12. 선고 2011구합39776 판결).
퇴직금 중간정산 형식으로 사직 후 재입사를 시킨 경우
퇴직금 중간정산을 위해 사직 후 재입사 형식을 취하도록 지시한 사안에서, 근로자에게 계속 근무할 의사가 있었고 회사도 이를 알았으므로 비진의 의사표시로 무효라고 판단했습니다(서울고등법원 2014. 12. 19. 선고 2014누42898 판결).
자신이 무기계약직이 된 것을 모르고 계약 만료를 전제로 사직서를 낸 경우
이미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자가 되었음에도 이를 모른 채 사용자가 계약기간 만료를 전제로 종용해서 사직서를 낸 경우, 법원은 진의 아닌 의사표시로 무효이고 이를 수리한 것은 부당해고라고 판단했습니다(서울고등법원 2012. 11. 14. 선고 2011누39419 판결).
진의 아닌 의사표시가 부정되는 경우
반대로 진의 아닌 의사표시가 인정되지 않아 사직서가 유효한 경우도 있습니다.
희망퇴직이나 명예퇴직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회사가 경영상 어려움을 강조하고 퇴직을 권유했더라도, 근로자가 제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스스로 판단해 신청했다면 진의에 의한 의사표시로 봅니다(대법원 2001. 1. 19. 선고 2000다51919 판결).
비위행위가 발각되어 징계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사직서를 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징계해고보다 의원면직이 유리하다고 판단해서 스스로 제출한 것이라면, 진정으로 바라지 않았더라도 당시 상황에서 최선이라 판단한 의사표시로 인정됩니다(대법원 2003. 4. 22. 선고 2002다65066 판결).
관리감독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자진해서 사직서를 낸 경우, 비위 발각 후 징계보다 의원면직을 선택한 간호사 사례 등도 진의 아닌 의사표시가 부정됐습니다.
강요에 의한 사직: 실질적으로 해고
진의 아닌 의사표시와 별도로, 사용자가 근로자에게 인사상·경제적 불이익이나 폭언 등을 가하면서 반복적으로 사직을 종용해 자유의사가 침해된 상태에서 사직서를 낸 경우, 판례는 이를 실질적으로 해고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강요가 인정된 사례들
합리적이고 공정한 기준 없이 일부 근로자를 문제 직원으로 확정하고, 사직원을 제출하지 않으면 대기발령·직위해제·해고예고 절차를 거쳐 직권면직시킨다는 방침 아래 반복적으로 사직을 종용해 의원면직 형식으로 끝낸 경우, 대법원은 이를 해고라고 판단했습니다(대법원 2002. 6. 14. 선고 2001두11076 판결).
사무실이 아닌 자택으로 불러 욕설과 폭언을 하면서 사직서를 요구해 약 5시간 만에 받아낸 경우도 강요에 의한 사직으로 인정됐습니다(서울행정법원 2013. 7. 23. 선고 2013구합2051 판결). 해당 근로자가 사직서 제출 직후 임원들에게 강압 상황을 알리는 호소문을 보낸 것도 중요한 판단 자료가 됐습니다.
사용자의 압박이 반복적이고 지속적이었는지, 근로자가 이를 거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지, 제출 이후 즉시 이의를 제기했는지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됩니다.
직장 내 괴롭힘과 강요에 의한 사직은 맞닿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련 판단 기준이 궁금하시다면 아래 글도 함께 참고해 보세요.
👉 직장 내 괴롭힘 5가지 유형 정리 + '갑질'로 면직까지 간 충청북도 사례
강요가 부정된 경우: 객관적 상황 고지는 강요가 아닙니다
중요한 판단선이 하나 있습니다.
비위행위에 대한 감사처리 결과를 통보하면서 "사직하지 않으면 징계절차에 회부되고 검찰 고발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알려준 경우, 법원은 이를 강요가 아니라 객관적인 상황에 대한 고지에 불과하다고 봤습니다(서울고등법원 2011. 5. 31. 선고 2010누23806 판결).
비위사실이 있고, 그에 따른 처리 결과를 사실대로 알려준 것이라면 그것은 강요가 아닙니다. 회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조치를 안내한 것과, 없는 불이익을 협박 수단으로 사용한 것은 다르게 평가됩니다.
또한 "경영진과 맞지 않으니 떠나라"는 말이 있었더라도, 이후 근로자가 1차 사직서에 이어 2차 사직서와 퇴직서약서까지 자발적으로 제출했다면 강요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사례도 있습니다(서울행정법원 2008. 9. 5. 선고 2008구합11549 판결).
반사회질서 약정에 의한 사직서
한 가지 특수한 경우도 있습니다.
노동조합장 선거에 참여한 두 조합원이 선거 결과에 따라 사직하기로 합의하고, 선거 전에 미리 퇴직원을 제출한 경우입니다. 법원은 이 합의가 법률상 강제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인데도 미리 퇴직원을 제출하게 해 사실상 강제한 것이므로 민법 제103조 반사회질서 행위에 해당하여 무효라고 봤습니다(서울고등법원 2010. 1. 20. 선고 2009누18853 판결).
증명책임은 근로자에게 있습니다
한 가지 반드시 알고 가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진의 아닌 의사표시임을 주장하는 쪽, 그리고 강요에 의한 의사표시임을 주장하는 쪽은 근로자입니다. 입증책임도 근로자가 집니다.
사직서를 쓴 경위, 어떤 말을 들었는지, 어떤 압박이 있었는지, 그리고 사용자가 이 상황을 알았는지 또는 알 수 있었는지를 근로자가 증명해야 합니다.
실무에서 이 부분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황이 억울하다고 해서 저절로 인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주고받은 문자, 이메일, 목격자 진술, 사직서 제출 직후 이의를 제기한 기록 등이 모두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사직서를 어쩔 수 없이 쓴 상황이라면, 지금 당장 당시의 상황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기록해두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입증이 어려워집니다.
마무리하며
사직서를 썼다고 해서 무조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진의 아닌 의사표시였거나, 강요에 의해 자유의사가 침해된 상태에서 제출했다면 그 사직서는 법적으로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직서에 기반한 퇴직 처리는 부당해고로 다툴 수 있는 출발점이 됩니다.
다음 편에서는 당연퇴직·직권면직 통보를 받은 경우, 이것이 해고에 해당하는지와 정당성 판단 기준을 사유별로 정리하겠습니다.